제5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(심화) 28번
1점조선 후기임술 농민 봉기, 진주 농민 봉기, 삼정이정청
밑줄 그은 ‘변란’에 대한 정부의 대책으로 옳은 것은?

정답과 해설 보기해설 접기
정답⑤
자료 분석
경상 감사 이돈영의 장계,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에 저항하여 일어난 진주 백성들의 봉기라는 단서를 통해 밑줄 그은 변란은 1862년(철종 13)에 일어난 진주 농민 봉기(임술 농민 봉기)임을 알 수 있다.
정답 해설
임술 농민 봉기(진주 농민 봉기)가 일어나자 정부는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였으며, 그의 건의에 따라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한 대책으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.
보기 해설
- ①군 통수권 장악을 위해 원수부를 두었다.
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고종이 황제의 군 통수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하였다.
- ②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를 해방하였다.
조선 후기 순조 때인 1801년에 내수사와 궁방, 중앙 관서의 공노비 6만 6천여 명을 해방하였다.
- ③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.
1894년 제2차 갑오개혁 추진 과정에서 고종이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으로 반포하였다.
- ④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였다.
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1866년에 주조하여 유통하였다.
- ⑤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.
정부는 안핵사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농민 봉기의 근본 원인인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임시 기구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.
핵심 정리
- 1862년(철종 13)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유계춘 등이 진주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다.
-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는 삼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임술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.
- 정부는 사태 수습을 위해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고,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.